절제된 디자인과 클래식에 소재로 가치와 멋 추구
이선우 서울쇼룸 대표
경복궁 옆 동네 서촌. 고즈넉하고 아기자기한 분위기가 맘에 들어 종종 방문하는 곳이다. 서촌에 있는 한옥들, 낮은 건물들을 보면 마치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자세히 알고 보면 새롭고 트랜디한 가게들이 가득하다는 점이 서촌의 반전 매력이다.
패션 디렉터로 20년 넘게 패션업계에 종사해 왔지만, 사실 필자는 문학을 전공한 인문학도 출신이다. 서촌은 인문학의 감성과 세련된 멋드러짐이 조화되어 특유의 고즈넉한 현대미가 돋보이는 동네로 많은 젊은이들의 가볼만한 곳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필자가 최근 서촌을 다니다보면 ‘낡았지만 늙지 않은 매력’을 물씬 느끼게 된다.
그리고 또! 서촌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브랜드가 있다. 17년차 베테랑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블랭크03(blank03’이다.
blank03이라는 브랜드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벌써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필자가 받은 blank03의 첫 이미지는 특별하다는 것이다. 아마 blank03을 이미 알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blank03과 특별이라는 이미지를 연결시킨 필자의 말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클래식한 아이템,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디자인, 어디나 매칭 가능한 차분한 톤의 색상 팔레트를 보면 평범한 듯 느껴질 수 있지만, 한눈에 봐도 느껴지는 소재 선정의 탁월함, 곳곳에 숨겨져 있는 디테일, 수십 번을 수정했을 것 같은 피팅을 보면 국내 브랜드 중에 컴패리전(comparison·비교)을 찾기가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사실 사진으로만 제품을 온전히 전달해야 하는 온라인에 이 브랜드는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필자가 blank03을 소개 받아 직접 만나고 옷들을 둘러봤을 때의 첫인상이 아직도 생생하다. 평범한 것 같지만 옷장에 있으면 든든하고 늘 꺼내 입게 되는 옷, 어느 자리에 가더라도 요란하게 차려입은 것은 아니지만 단정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내기에 더없이 좋은 옷, 이라는 인상이었다. 한마디로 내 옷장에 오래도록 남아 늘 입을 수 있는 세련되고 멋지고 훌륭한 옷들이었다.
육정인 디자이너
이 브랜드를 만드는 사람이 누군지도 궁금했다. 내가 아는 육정인 디자이너는 blank03 그 자체이다. 겉모습으로 보아도 이야기를 나누어도 내가 가진 blank03의 이미지와 정확하게 부합한다.
사실 육정인 디자이너만큼 다양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사람은 흔치 않다. 이화여대 의류직물학과를 졸업하고 대기업의 디자이너로 시작해 미국 California에서의 Head 디자이너, 빠른 변화가 핵심인 동대문 디자이너 그리고 중국 상해에서의 경험까지. 제도권, 비제도권 그리고 글로벌 시장의 경험을 모두 가진 디자이너는 내가 알기론 국내에 유일하다.
돌고 돌아 클래식이라고 했던가? 결국 육정인 디자이너가 클래식한 아이템을 기반으로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런 백그라운드를 보면 타임리스한 아이템 속의 수많은 변주는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얼핏 보기에는 비슷해 보이나 알고 보면 특별한 blank03의 DNA는 육정인 디자이너의 경험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디자이너의 배경이 곧 실력은 아니다. 하지만 디자이너의 경험은 브랜드를 이끌어 가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을 하게 된다. 다양한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클래식하면서도 촌스럽지 않고 세련된 특유의 감각을 살려낼 수 있는 것이다. blank03이 여느 해외 매스티지 브랜드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이유는 디자이너가 글로벌한 경험을 바탕으로 세련됨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한 끗을 표현해냈기 때문이다.
서촌에는 blank03의 쇼룸이 있다. 왜 서촌에 자리 잡았냐는 질문에 유럽의 어느 도시를 거닐다가 우연히 마주친 디자이너의 아뜰리에 같은 이미지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서촌에 쇼룸을 열었다는 디자이너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래서 blank03의 쇼룸은 여느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숍(shop)과는 차별된다.
쇼룸의 한켠에는 디자이너가 파리 마레지구에서 직접 구입한 이름 모를 화가의 그림이 있고, 디자인의 영감이 되어주었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실제로 blank03의 옷들은 서촌 쇼룸에서 디자인되고 있다. 서촌의 분위기, 방문하는 고객들, 디자이너의 일상이 모두 디자인의 원천이 되니 서촌과 닮은 blank03이 이해가 되지 않는 바가 아니다.
얼마 전 서촌 쇼룸을 방문했을 때 육정인 디자이너와 나눈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저도 어린 시절에는 유행템이라고 하면 뭐든지 입어봤어요. 그런데 몇 년이 지나고 아니 일이년만 지나도 다시 꺼내 입게 되는 옷은 거의 없더라고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그 시절의 사진을 꺼내 보면 왜 이렇게 촌스럽게 느껴지던지. 그래서 저는 매년 두고두고 옷장에서 꺼내 입으려면 절제된 디자인과 클래식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옷이 평범하지 않고 가치 있어지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소재이고요.”
이 말을 듣고 무릎을 탁 쳤다. 매년 수많은 브랜드들이 쏟아지지만 그 사이에서 blank03 중심을 확고히 잡고 있는 이유를 그리고 육정인 디자이너가 왜 이렇게 소재에 집착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진정으로 ‘멋짐’이라는 것은 트렌드에 휩쓸리기 보다는 시간이 지났을 때 확실하게 드러난다는 어찌 보면 평범한 진리를 blank03은 이미 담고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변하지 않을 것 같은 타임리스하고 클래식한 아이템을 기반으로 들여다보면 특별한 디테일이 숨어 있는 브랜드, 화려하지는 않지만 은은한 멋짐이 있는 브랜드, 몇 년이 지나도 내 옷장을 든든히 지키고 있을 브랜드 내가 서촌 하면 blank03이 떠오르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