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입는 주체에 대한 관심과 고찰로부터 시작
이선우 서울쇼룸 대표
때로는 뜻하지 않게 취향의 발견이 이뤄질 때가 있다. 필자는 수많은 디자이너 브랜드를 접하고, 새로운 디자이너를 소싱하는 것에 익숙하다. 만약 필자가 이런 활동이 그저 사무적이고 일을 위한 것이었다면 지속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아직도 소년처럼 호기심이 많아 새로운 것에 대한 발견에 많은 즐거움과 보람을 느낀다.
최근에는 요란하고 화려한 컬렉션보다 디자이너의 스토리가 있고, 옷 자체의 기본이 탄탄한 브랜드에 꽤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관심을 기반으로 브랜드를 찾으려고 하다 보니 오히려 기본에 충실하면서 스토리가 탄탄한 브랜드를 찾는 것이 참 어려웠다.
무엇을 막 붙여 넣는 것보다 본질에 충실하기 위해 무언가를 빼내는 것이 더욱 어렵다는 것을 패션MD와 디렉터로 20여년을 넘게 종사하며 새삼 깨닫게 된다.
‘레이허(RAYHER)’는 이런 어려움과 깨달음 사이에서 한 번에 확 이끌리게 된 브랜드이다. 필자가 운영하는 디자이너 플랫폼 서울쇼룸이 다양한 브랜드로 확장하기 위해 입점 신청을 오픈하면서 수많은 제안서를 받았는데, 갑자기 신청한 수많은 브랜드들의 제안서를 둘러보다가 레이허의 제안서를 보는 순간, 사막에 오아시스를 만나듯 한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디자이너와 브랜드가 궁금했다. 그래서 디자이너에게 들어보기로 했다. 필자가 허영래 디자이너에게 그 스토리를 듣고 여러분께 전해드리고자 한다.
허영래 디자이너의 스토리
허영래 디자이너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부터 사부작사부작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었다. 복잡하게 머리 굴리지 않고, 손으로 작업하고 만들어내는 것에 뿌듯함을 느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의류학과를 가게 되고 디자이너의 꿈을 키우면서 졸업 후 그 시절 제일 핫했던 브랜드 ‘오브제(OBZEE)’에 입사했다. 국내 컬렉션을 진행했던 OBZEE는 다양한 패션쇼용 화려한 소재들과 아이템도 다루어 볼 수 있었고, 소비자 중심의 커머셜 아이템이나 컬렉션 아이템들 가리지 않고 경험할 수 있었다.
이후에 Y&KEI라는 브랜드로 뉴욕 컬렉션에 참가해서 세계적인 컬렉션에 옷을 디자인해내는 값지고 소중한 경험도 있었다.
사실 화려하고 거창한 옷들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컴팩트하고 웨어러블하지만, 유니크한 한 끗 정도의 포인트가 있는 옷을 좋아 한다.
그래서 쇼를 위해서 쇼복을 디자인하거나 백화점 소비자를 위한 디자인을 하거나 브랜드의 취향에 맞추어 디자인을 했지,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은 접어두었고, 항상 내 취향에 맞는 디자인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었다.
허영래 디자이너의 작업실
홍대에 셀렉트 샵 형태의 매장을 운영한 적이 있었다. 그때 당시에는 흔하지 않았던 국내외 아이템들을 바잉하고 판매하는 매장이었는데, 항상 바잉만 하는 점을 아쉬워하면서 운영했었다. 내가 원하는 디자인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었다.
지금처럼 디자이너 브랜드 설립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고, 소규모로도 내 디자인을 생산하는 일이 어려운 때였다. 내 브랜드를 위한 디자인은 아니지만 다시 디자이너로 일하게 되었고, 디자인을 그리고, 가봉을 보고, 소재를 고르고, 샘플을 만들고, 피팅을 하고, 생산을 하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일련의 과정들이 나에게는 너무 재밌고 무엇보다도 소중한 일로 다가왔던 것 같다.
그렇게 소중하고 재미있게 20여 년 간 디자인 일을 하다가 어느 순간 내가 그 브랜드에 맞추는 디자인이 아닌 내가 원하는 디자인들이 있는 나의 브랜드를 만들고 싶었다.
거창하게 생각한건 아니고 아주 소박하게 시작된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 디자인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 레이어다.
레이허는 그렇게 2023FW를 시작으로 런칭된, 내가 좋아하는 요소들로 이루어진 브랜드라고 할 수 있다.
디자인을 할 때 옷의 실루엣이나 구조에서 새로움을 넣는 것을 좋아한다. 그건 패턴에서의 새로움을 뜻하기도 한다.
패턴을 이리저리 변화시켜 새로운 구조의 옷을 만드는 것. 그렇지만 너무 화려하거나 너무 부담스럽지 않은 룩을 선호하고, 불편하게 피팅되지 않고, 자주 꺼내 입고 싶은 그런 옷. 퀄리티 좋은 소재로 만들어 패스트 패션이 아니라 두고두고 입고 싶은 클래식 아이템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레이허가 추구하는 방향이다.
‘레이허’ 룩북
온오프라인에서 레이허를 알아봐주시고 구매해주시는 한분 한분이 너무 감사하고 보람되며, 내가 너무 좋아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패션디자이너로써 옷을 만들어 내는 일이 뿌듯하고 행복하다.
소박한 시작이었지만 앞으로 레이허가 국내에서도 해외에서도 활약하는 거창한 꿈을 가지고 있다. 레이허 소비자들의 칭찬 리뷰나 찐팬들의 응원이 점점 더 큰 꿈을 꾸게 한 것 같다.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레이허는 더 좋은 퀄리티의 소재와 날씬하고 예쁘게 보이는 구조적인 실루엣으로 새로움이라는 포인트가 한 방울 섞인 옷으로 여러분들에게 감동을 주는 브랜드가 되고 싶다.
경험과 경력의 힘
레이허의 2024스프링 컬렉션의 테마는 ‘STAY PINK’이다. 핑크 컬러의 ‘느낌’에 주목해 ‘핑크’처럼 제일 여성스럽고 아름다운 지금에 머무르고 싶은 옷’을 기획했다.
다음 시즌인 썸머 컬렉션의 테마는 ‘FREE FROM MYSELF’이다. 여름시즌은 자신으로부터도 자유롭게 속박이나 구속이 없도록 옷에서도 그렇게 표현하고 싶었다.
두 시즌의 테마 만을 보아도 레이허는 옷을 입는 주체에 대한 관심과 고찰로부터 상품이 시작된다는걸 알 수 있다. 입는 사람을 위해 세심히 살핀 옷, 입는 사람을 배려한 옷으로 다음 시즌이 궁금해지는 그런 브랜드가 목표이다.
모래성에 뭔가를 쌓는다면 파도나 바람에 쉽게 무너진다. 탄탄한 기초 아래 쌓아 수 백 년을 넘게 그 자리를 지키는 중세의 성을 보면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느끼게 된다.
‘레이허’ 2024썸머 컬렉션
허영래 디자이너는 레이허를 런칭하기 전 오랜 시간을 메이저 브랜드에서 경력을 쌓았다. 어쩌면 이런 경험과 경력이 새로운 런칭에 주저함과 두려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디자이너는 조급함과 짧은 시간의 이슈 라이징보다는 천천히 그렇지만 단단하게 자신만의 브랜드를 꾸려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것이 경험과 경력의 힘이다.
레이허는 분명 옷장에 오래 남아있으며 시간이 지나도 참 좋은 옷으로 손이 자주 가는 브랜드로 천천히 그렇지만 탄탄히 고객과 바이어가 쌓여갈 것이다.